배움의 발견

🔖 아버지로부터 나는 책들은 섬기거나 피해야 하는 것들이라고 배웠다. 주님의 책 - 모르몬 선지자들 혹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집필한 책들 - 은 연구 대상이라기보다는 공경과 사랑의 대상이었다. 매디슨 같은 사람이 쓴 책들이 거푸집이라면 내 생각은 회반죽처럼 그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거푸집에 부어서 그 형태를 그대로 베껴 내야 마땅했다. 그들의 책은 어떻게 스스로 생각하는지를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을 생각할지를 배우기 위해서 읽었다. 주님의 책이 아닌 책들은 금지 품목이었다. 그 책들은 위험하고, 그 교활함이 너무도 강력하고 물리칠 수 없이 유혹적이기 때문이었다.

에세이를 쓰기 위해서는 그 책들을 다른 방식으로 읽어야만 했다. 두려움이나 숭배를 마음속에서 배제해야만 했던 것이다. 버크는 영국 왕정을 옹호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그가 폭군의 하수인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의 책을 집에 들이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책에 쓰인 말들을 나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고 믿으며 읽는 것은 전율이 흐를 정도로 기쁜 일이었다. 그와 동일한 전율을 매디슨, 해밀턴, 제이의 글을 읽을 때도 느꼈다. 특히 그들의 결론보다 버크의 결론에 나 스스로 동조하게 될 때, 혹은 그들의 생각이 내용 면에서는 그리 다르지 않고 단지 형식적으로만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 기쁨은 더욱 컸다. 이런 방식으로 책을 읽는 것에는 대단한 가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바로 책들은 나를 속이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나는 약한 사람이 아니라는 가정이 바로 그것이었다.

에세이를 끝내고 스타인버그 교수에게 보냈다. 이틀 후, 약속대로 교수실에 들어갔을 때 그는 기분이 가라앉은 듯 보였다. 책상 건너편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교수를 보며 나는 내 에세이가 엉망이었다는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무지한 머리의 산물이고, 허황된 가정에, 근거 없는 결론을 너무 많이 도출해 낸 에세이라는 말을 들을 마음의 준비를 했다.

<내가 케임브리지에서 가르친 지 30년이에요.> 그가 말했다. <이 에세이는 그동안 읽어본 것들 중 가장 훌륭한 에세이 중 하나입니다.>

나는 모욕당할 준비는 되어 있었지만, 이런 말을 들을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카페에서 나와 도서관으로 갔다. 온라인으로 5분 정도 검색하고 서가에 몇 번 왔다 갔다 한 후, 나는 산더미 같은 책과 함께 늘 앉던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제2의 물결의 주된 저자들이라고 알게 된 베티 프리던, 저메인 그리어, 시몬 드 보부아르 등의 저서들이었다. 그러나 책마다 몇 페이지 넘기지도 못하고 서둘러 덮고 말았다. 나는 <질>이라는 단어가 인쇄된 것을 본 적도, 소리 내어 말해본 적도 없었다.

나는 다시 인터넷을 검색한 다음 서가로 돌아가 제 2의 물결에 관한 책들을 반환하고 제1의 물결 이전의 책들을 찾았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와 존 스튜어트 밀의 저서들이었다. 나는 오후 내내, 그리고 저녁까지 그 책들을 읽었고, 처음으로 어릴 적부터 느껴 왔던 불편함을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어휘들을 쌓아 갔다.

리처드 오빠는 남자, 나는 여자라는 사실을 처음 이해한 순간부터 오빠의 미래와 나의 미래를 바꾸고 싶었었다. 나의 미래는 어머니, 오빠의 미래는 아버지였다. 두 단어는 비슷하게 들리지만 전혀 비슷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자 주도하는 사람이 되는 일이었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가족의 질서를 잡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고,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그렇게 질서를 잡히는 대상이 되는 것이었다.

나는 나의 갈망이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지식, 그리고 나 자신에 관한 수많은 지식들은 내가 아는 사람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내 머리에 심어진 것들이었다. 그 목소리들은 때로 속삭이고, 때로는 질문을 던지고, 때로는 염려를 하며 나를 평생 따라다녔다. 그 목소리는 내가 옳지 않다고 속삭였다. 내 꿈은 왜곡된 것이라고. 그 목소리는 여러 사람의 것이었고, 다양한 말투로 나타났다. 어떨 때는 아버지의 목소리였지만, 나 자신의 목소리였던 경우가 더 많았다.

나는 그 책들을 방으로 가져가서 밤새 읽었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열변도 좋았지만 읽는 순간 세상을 움직여 버린 단 한 줄의 글은 존 스튜어트 밀의 책에서 발견했다. <그 주제에 관한 어떤 지식도 최종적 결론이 될 수는 없다.> 밀이 염두에 둔 주제는 여성의 본질이었다. 밀은 여성들이 너무도 긴 세월 동안 강제당하고, 회유당하고, 옆으로 밀려나고, 여성적이라는 미명하에 일그러져 왔기 때문에 이제는 여성의 타고난 능력과 염원을 정의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고 주장했다.

피가 머리로 몰려들었다. 아드레날린과 무한한 가능성, 그리고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느낌이 함께 밀려들면서 내 정신을 깨웠다. <여성의 본질에 관한 어떤 지식도 최종적 결론이 될 수는 없다.> 진공 상태, 지식이 부재하는 검은 공간에서 그만큼 위안을 얻어 본 적이 없었다. 밀의 선언은 <네가 무엇이든 간에, 네가 여성인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케임브리지의 내 생활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신했다. 아니, 나 역시 그랬다. 나도 내가 케임브리지에 있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으로 변신했다. 그토록 오랫동안 느껴 왔던 내 가족에 대한 수치심이 거의 하룻밤 사이에 자취를 감췄다. 평생 처음으로 나는 내가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친구들에게 내가 한 번도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리고 여러 개의 폐철처리장과 헛간과 목장들과 함께 벅스피크가 어떤 곳인지 친구들에게 이야기해 줬다. (...) 내가 가난했고, 무지했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나는 한 치의 수치심도 느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제야 수치심의 뿌리가 어디였는지 깨달았다. 내가 대리석으로 지어진 콘세르바토리에서 공부하지 않았고, 아버지가 외교관이 아니어서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이고, 엄마가 그런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사람이어서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내 수치심은 철컥철컥 돌아가는 전단기의 칼날로부터 나를 밀어 내는 대신, 오히려 그쪽으로 나를 밀어 넣는 아버지를 가졌다는 사실에서 나온 것이었다. 내 수치심은 내가 바닥에 엎드려서 목을 눌리고 있는데도 바로 옆방에서 엄마가 눈과 귀를 막고, 그 순간 내 엄마가 내 엄마가 되는 것을 포기했다는 사실에서 나온 것이었다.

나는 나를 위해 새로운 역사를 썼다. 나는 사냥을 하고, 말을 길들여서 타고, 폐철을 수집하고, 산불을 끈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가진 인기 있는 만찬 손님이 됐다. 산파이자 기업가인 멋진 엄마, 폐철 처리장을 운영하는 괴팍한 광신도 아버지. 나는 마침내 나의 이전 삶에 대해 정직해졌다고 생각했다. 정확한 진실은 아니었지만, 더 큰 의미에서는 진실이었다. <앞으로 펼쳐질> 진실, 미래의 진실에 가까우므로. 이제 모든 것이 더 나아지는 쪽으로 방향이 잡혔으니까. 이제 엄마가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으니까.

과거는 영향을 끼칠 수 없는, 대단치 않은 유령에 불과했다. 무게를 지닌 것은 미래뿐이었다.


🔖<네게 은총을 내리겠다는 제안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하겠다.> 아버지가 말했다.

그 은총은 자비였다. 아버지는 오드리 언니에게 제안했던 것과 같은 항복 조건을 내게도 제안한 것이다. 언니에게 이것이 얼마나 큰 안도였을지 상상이 갔다. 자신의 현실 - 나와 언니가 함께 알고 있던 현실 - 을 아버지의 현실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언니가 느꼈을 안도감 말이다. 그렇게 적은 대가만 지불하면 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언니는 정말 고마운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나는 언니가 한 선택을 두고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같은 선택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그 순간 알고 있었다. 내가 그때까지 해온 모든 노력, 몇 년 동안 해온 모든 공부는 바로 이 특권을 사기 위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내게 준 것 이상의 진실을 보고 경험하고, 그 진실들을 사용해 내 정신을 구축할 수 있는 특권. 나는 수많은 생각과 수많은 역사와 수많은 시각들을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스스로 자신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믿게 됐다. 지금 굴복한다는 것은 단순히 언쟁에 한 번 지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내 정신의 소유권을 잃는다는 의미였다. 이것이 내게 요구되는 대가였다. 이제 이해가 됐다. 아버지가 내게서 쫓고자 하는 것은 악마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다.

아버지는 주머니에서 유리병에 담긴 성유를 꺼내 내 손바닥에 놓았다. 나는 그 병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의식을 거행하는 데는 이 성유만 있으면 됐다. (...) 나는 내가 항복하는 장면을 상상해 봤다. 눈을 감고 내가 행한 신성모독을 모두 되뇌는 장면. 내가 겪은 변화, 주님의 도움으로 겪은 변신 등을 어떻게 묘사하고, 어떤 단어들을 외치면서 어떻게 고마움을 표현할지 상상했다. 그 단어들은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만반의 준비 태세를 갖추고 내 입을 벌리기만 하면 되는 상태였다.

그러나 내가 입을 열자 그 단어들은 사라지고 말았다.

<사랑해요.> 내가 말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어요. 죄송해요, 아버지.>


🔖나머지 가족들과 이 분리가 영원히 계속될지, 아니면 언젠가 내가 다시 돌아갈 수 있게 될지 모르지만, 지금 내 마음은 평화롭다.

그 평화는 쉽사리 얻은 것이 아니었다. 2년에 걸쳐 나는 아버지의 단점을 열거하고, 끊임없이 그 기록을 업데이트하면서 보냈다. 마치 아버지에게 품었던 모든 반감과, 실제 혹은 상상 속에서 벌어진 가혹함이나 방임의 예가 많으면 내가 아버지를 내 삶에서 끊어 버린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기나 한 것처럼 말이다. (...) 그러나 정당화하는 데 성공한다 해도 죄책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른 일들을 향한 분노가 아무리 크고 거세다 해도 죄책감까지 누를 수는 없었다. 죄책감은 다른 이들과 상관없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죄책감은 자신의 비참함에 대한 두려움이다. 다른 사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래된 불만들을 끊임없이 들먹이며 탓하기를 멈춘 후에야, 아버지의 죄와 내 죄의 무게를 견주는 것을 멈추고 내 결정을 그 자체로 받아들인 후에야 비로소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버지를 등식에서 완전히 뺀 후에야 가능해진 일이었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 내 결정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아버지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이라는 것도 받아들였다. 아버지가 그럴 만큼 큰 잘못을 해서가 아니라 내가 필요했기 때문에.

그것은 내가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내 삶에 들어와 있을 때는, 내 삶에 대한 결정권을 차지하기 위해 나와 씨름을 하고 있을 때는, 나는 아버지를 군인의 눈으로, 안개처럼 자욱한 갈등 속에서 바라봤었다. 그때는 아버지의 부드럽고 섬세한 부분을 보지 못했다. 아버지가 내 바로 앞에 분노하는 모습으로 크게 버티고 서 있을 때는 내가 어린 시절 알았던 아버지의 모습, 웃을 때 배까지 흔들리고 안경이 반짝거리던 모습을 떠올릴 수 없었다. 아버지가 엄격한 모습으로 서 있을 때는 화상으로 입술이 타버리기 전, 옛 추억으로 눈에 눈물이 차오르면 입술을 보기 좋게 움찔거리는 모습을 내가 좋아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 먼 거리와 기나긴 시간을 사이에 둔 지금에야 나는 그런 것들을 기억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나와 아버지를 가르고 있는 것은 시간과 거리만이 아니다. 그것은 변화된 자아다. 나는 아버지가 기른 그 아이가 아니지만, 아버지는 그 아이를 기른 아버지다.

아버지와 나 사이에 생긴 간극은 20년에 걸쳐 서서히 벌어지고 커져 가고 있긴 했지만 그것이 더 이상 다리를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커져 버린 순간은 그 겨울 밤, 내가 목욕탕 거울에 비친 나를 노려보고 있는 동안 나 모르게 아버지가 화상으로 비틀어져 버린 손으로 수화기를 들고 오빠의 전화번호를 누른 때였다. 디에고, 칼. 그 다음에 벌어진 일들은 굉장히 극적이었지만, 진정으로 극적인 일은 그 목욕탕 안에서 이미 벌어진 후였다.

이유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내가 거울로 들어가고 나 대신 거울 속의 열여섯 살짜리 소녀를 내보내지 못한 그 순간이 바로 극의 절정이었다.

그 순간까지 그 열여섯 살 소녀는 늘 거기 있었다. 내가 겉으로 아무리 변한 듯했어도 - 내 학업 성적이 아무리 우수하고 내 겉모습이 아무리 많이 변했어도 - 나는 여전히 그 소녀였다. 좋게 봐준다 해도 나는 두 사람이었고, 내 정신과 마음은 둘로 갈라져 있었다. 그 소녀가 늘 내 안에 있으면서, 아버지 집 문턱을 넘을 때마다 모습을 드러냈다.

그날 밤 나는 그 소녀를 불렀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를 떠난 것이다. 그 소녀는 거울 속에 머물렀다. 그 이후에 내가 내린 결정들은 그 소녀는 내리지 않을 결정들이었다. 그것들은 변화한 사람, 새로운 자아가 내린 결정들이었다.

이 자아는 여러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변신, 탈바꿈, 허위, 배신.

나는 그것을 교육이라 부른다.